
이가림 (李嘉林) 시인 1943년 만주 출생, 정읍에서 성장. 성균관대 불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프랑스 루앙대학 불문학 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후광문학상 수상. 시집 『빙하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순간의 거울』, 『내 마음의 협궤열차』 등 에세이집 『사랑, 삶의 다른 이름』, 역서 『촛불의 미학』, 『물과 꿈』, 『꿈꿀 권리』 등. 현재 인하대 불문과 교수.
------------------------------------------------게시 목록------------------------------------
내 마음의 협궤열차 1 / 이가림 석류 / 이가림 바지락 줍는 사람들 /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 이가림 빙하기 / 이가림 찌르레기의 노래 3 / 이가림
밴댕이를 먹으며 / 이가림
내 마음의 협궤열차 1 / 이가림
측백나무 울타리가 있는 정거장에서 내 철없는 협궤열차는 떠난다 너의 간이역이 끊어진 철교 그 너머 아스라한 은하수 기슭에 있다 할지라도 바람 속에 말달리는 마음 어쩌지 못해 열띤 기적을 울리고 또 울린다 바다가 노을을 삼키고 노을이 바다를 삼킨 세계의 끝 그 영원 속으로 마구 내달린다
츨발하자마자 돌이킬 수 없는 뻘에 처박히고 마는 내 철없는 협궤열차
오늘도 측백나무 울타리가 있는 정거장에서 한 량 가득 그리움 싣고 떠난다
석류 / 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바지락 줍는 사람들 / 이가림
바르비종 마을의 만종 같은 저녁 종소리가 천도복숭아 빛깔로 포구를 물들일 때 하루치의 이삭을 주신 모르는 분을 위해 무릎 꿇어 개펄에 입 맞추는 간절함이여
거룩하여라 호미 든 아낙네들의 옆모습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不在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빙하기 / 이가림 ―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에게
그 헐벗은 비행장 옆 낡은 에레미야 병원 가까이 스물 아홉 살의 강한 그대가 죽어 있었지.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 스토브조차 꺼진 다락방 안 추운 빙벽氷壁 밑에서 검은 목탄으로 뎃상한 그대 어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킬리만자로의 눈 속에 묻혀 있는 표범 이마, 빛나는 대리석 토르소의 흰 손이 떠오르지. 지금 낡은 에레미야 병원 가까이의 지붕에도 눈은 내리고 겨울이 빈 나무 허리를 쓸며 있는 때, 캄캄한 안개 속 침몰하여 가는 내 선박은 이제 고달픈 닻을 내리어 정박하고서 축축히 꿈의 이슬에 잠자는 영원인 것을, 짙은 밤 부둣가 한 모퉁이로 내 아무렇게나 혼자서 떠나보네. 갈색 머리 흑인 여자의 서러운 이빨같이 서걱이는 먼 겨울 밤 바다 살갗은 유리의 달에 부딪쳐 바스러지고 죽음보다 고적한 외투 속의 내 사랑은 두 주일이나 그냥 있는 젖빛 엽서 나목裸木 끝에 마지막 한 장 가랑잎새로 지는 것을 쓸쓸히 웃으며 있네. 지난 생 마르뗑의 여름 밤 주막에서 빨갛게 등불을 켜 달고 여린 별빛들이 우리 잔등에 떨어져 와 닿는, 들끓는 소주를 독하게 마시며 울었지.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 그대 건강한 의사가 되겠다고 여름내 엄청난 야망은 살아 자기 안의 한 무더기 폭약에 방화도 했지만 참혹하게 파손되어 간 내실內室이었음을, 어느 저녁 식탁에선가, 눈물 글썽이게 하는 그대 슬픈 소식을 건네 들었지. 지금은 옷고름처럼 나부끼는 달빛에 젖어 마른 갯벌 바닥으로 배회하다 무릎까지 빠지는 맨발의, 괴로운 밤 게(蟹)가 되어서 돌아오는 조금씩 미쳐가며 나는 무서운 취안醉眼인 채 황폐한 자갈밭을 건너 흐린 가스등 그늘이 우울한 시장거리에서 눈은 내리고 하얀 수의囚衣 입은 천사처럼 잠시 죽어 봤으면 생각하다가, 아아 자꾸만 목이 메이고 싶어지는 내 목관木管의 노래는 떨려 오뇌의 회오리바람에 은빛 음계들이 머리칼마다 흩날리며 있네. 그 드뷔시 찻집 유리 속의 금발이 출렁이는 인형은 젖은 눈에 성에 낀 창 밖을 보고 수런대는 목소리들 잔盞 둘레로 넘쳐나 비듬처럼 쌓여 가는데 잊히인 의자 아래 이랑져 오는 음악의 꽃빛 눈부시는 바람결 소리여, 이 침전하는 장송葬送의 파도 가에 앉아서 단 한번 고운 색깔이 아롱진 어안魚眼의 나는 뜨거운 두 손으로 피곤한 이마를 묻어 보네.
찌르레기의 노래 3 / 이가림
지상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 아궁이에 기어드는 가랑잎같이 그대 따스한 슬픔에 내 언 슬픔을 묻을 수 있다면 이 세상 밤길뿐이었던 나날들 언제나 캄캄했다고 말하지 않으리
우리가 정녕 생의 거미줄에 매달린 하나가 되기 위한 두 개의 물방울 같이 마주보는 시선의 신비로 다가간다면 번갯불 번쩍 내리쳤다 스러지는 그 찰나 그 영원 속에 별 머금은 듯 영롱한 눈물의 보석 하나 아픈 땅에 떨굴 수 있으리
지상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 아궁이에 기어드는 가랑잎같이 오늘밤 화알활 피어나는 그대 모닥불 품에 내 사그러져가는 영혼의 숯을 태우고 말리
밴댕이를 먹으며 / 이가림
무게없는 사람을 달아 보고 또 달아 보느라 늘 입속에 말을 우물거리고만 있는 나 같은 반벙어리 보라는 듯 영종도 막배로 온 중년의 사내 하나 깻잎 초고추장에 비릿한 한 움큼의 사랑을 싸서 애인의 입에 듬뿍 쑤셔넣어 준다 하인천 역앞 옛 청관으로 오르는 북성동 언덕길 수원집에서 밴댕이를 먹으며 나는 무심코 중얼거린다 그렇지 그래 사랑은 비릿한 한 움큼의 부끄러움을 남몰래 서로 입에 넣어주는 것이지...
한국문학 (2001년 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