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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스크랩]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게서 무엇을 배울까 - 2

by 자유야 2015. 3. 14.

“예수는 ‘보이는’ 하느님” - 장일순 선생의 종교관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게서 무엇을 배울까-2]


황경훈  |  editor@catholicnews.co.krr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암이 들어 병원에서 수술을 시도했다가 그냥 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현주 목사는 그대로 황천길로 들게 하기에 너무나 아깝다고 생각해서인지 ‘욕심’을 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간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안에서 작은 교자상을 사이에 두고 시작한 것이 “노자 이야기”라는 제목의 <도덕경> 풀이였다.


   
▲ <노자 이야기> 장일순, 이아무개 옮김, 2003
내가 무위당 선생을 알게 된 것이 이 책을 통해서였고, 내게 이 시간은 마치 한 겨울에 잠시 내려 쪼이는 한 줄기 따뜻한 빛이었다. 당시 나는 필리핀에서 그래도 ‘진보적인’ 서양 선교사들의 지도 아래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종교와 문화에 대한 생각부터가 다른 이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새로움도 있었지만 답답함이 더 컸다.

그 때 아침마다 성서를 옆에 놓고 한 시간씩 두런두런 무위당이 들려주는 <도덕경>을 듣지 못했다면 아마 신앙을 등지거나 학문을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위당의 종교 이해 속에서 나는 신앙이 바다 같은 끝없는 자유라는 것을 확신했고,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10여 년 동안 승려로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베스트셀러 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은 무위당의 종교가 매우 다원적이면서도 각 종교가 그 안에서 갈등 아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유가(儒家)인가 하면 불가(佛家)요, 불가인가 하면 노장(老莊)이며, 노장인가 하면 또 야소(耶蘇)의 참얼을 온몸으로 받아 실천하여 온 독가(督家)였던 선생은, 무엇보다도 진인(眞人)이었다. 속류 과학주의와 속류 유물론과 유사 종교적이고 혹세무민적이며 종교적 신비주의에 추상적 형이상학만이 어지럽게 춤추는 판에서 대중성, 민중성, 소박성, 일상성 속에 들어 있는 거룩함을 되찾아 내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한 몸뚱어리의 두 이름으로 더불어 함께 영적 진보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 길밖에 길이 없다는 것을, 순평(順平)한 입말로 남겨 준 선생이시다.”(김성동,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무위당 선생의 다원적이면서도 ‘유기적’ 종교관은 유불선과 그리스도교를 통합한 것이지만, 동학의 2대 교주 해월의 사상, 그 가운데서도 향아설위(向我設位)와 함께 이천식천(以天食天)을 강조하는 데서 그의 생명사상은 해월에게 크게 기대고 있다고 보인다. 여기서 유불선과 그리스도교가 서로 잘 소통하고 융섭하여 마치 몸에 잘 맞아 편안한 옷과 같은 그런 경지를 서양 신학자들은 물론이요, 한국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성직자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이를 ‘종교혼합’이라고 곡해한다면 무위당의 깊은 한국적 신앙과 토착적 영성의 가능성은 제대로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무위당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최시형의 이천식천을 이렇게 푼다.


“해월 선생 말씀에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말씀이 있어요.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말이에요. 동학에서 일컫되 인내천(人乃天)이라, 그리고 사람만이 하늘이 아니라 곡식 하나도 한울님이다, 돌 하나도, 벌레 하나도 한울님이다, 이 말이에요.”(이용포, “무위당 장일순-생명사상의 큰 스승”)


   
▲ 장일순 ⓒ무위당 사람들
무위당은 불교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매우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다. 가톨릭 농민회 지도신부였던 정호경은 무위당에게 팔만대장경의 뜻을 두 구절로 줄였다는 ‘불취외상 자심반조’(不取外相 自心返照)란 글을 써달라고 부탁해서 받고는 고마운 마음에 스스로 장일순의 마음이 되어 이를 헤아려 본다. 여기서도 장일순의 종교간 융섭과 일치 사상이 정호경의 종교사상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가톨릭 신부가 불교 경전의 알맹이를 화두로 삼는다! 거 참 좋구나! 그래, 종교의 벽을 넘나들며 산다는 것, 그게 하느님의 뜻일 테고, 예수 석가의 길이니까, 마땅하고 옳은 일이야! 하지만 거기서 그냥 머물러서야 쓰겠는가! 끝도 없이 나아가야지!... 애당초 한몸이었으니까! 이념의 벽도 종교의 벽도 허물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벽도 허물고 하나로 통일될 때, 그 때 거기서 참 생명이신 하느님도, 너도, 나도 제대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정 신부, 아우님(생전의 선생은 술자리에서 저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렇지 않소이까? 하하하.”(최성현, <좁쌀 한알>)


정호경을 통한 장일순의 이러한 종교사상이 조금도 꾸밈이 있다거나 과장되지 않은 것임이 다음의 한 일화를 통해서 밝혀진다. 지인들과 지학순 주교, 장일순 등이 치악산에 갔었는데, 가는 길에 상원사란 절이 있어 거기에 들렀다. 장일순과 지학순은 대웅전 안의 불상을 향해 합장을 하고 공손히 절을 하는 것을 보고 한 일행이 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천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째서 불상을 보고 절을 해요? 장일순이 껄껄 웃었다. 이 사람아, 성인이 저기 앉아 계시는데 어찌 우리 같은 소인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성현, <좁쌀 한알>)


시대적인 이유도 있었고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쨌든 무위당은 글을 남기지 않았고, 여러 강의에서 비교적 자주 비유적으로 언급은 하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론이나 신론이라고 할 만한 것은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불선과 그리스도교를 ‘융섭’한 종교가 그의 사상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더욱이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다원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위대한 한 종교의 성인으로, 또 ‘보이는’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맑스가 착취와 피착취만으로 얘기할 때 하느님은 보이지도 이해될 턱도 없다고 비판하면서 ‘안 보이는’ 하느님의 중요성을 ‘보이는’ 하느님인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공(空)이라든가 기(氣)라든가 부처님이라든가 하느님이라든가 하는 이 사실은 눈으로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예수는 뵈는 하느님이고, 하느님 아버지는 안 뵈는 하느님이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그 모범과 자연의 이치대로 가장 잘 살아간 사람은 -여기 그리스도교인이 많으니까-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여기 이 자리에도 예수님이 많아.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너희들은 오라질 놈들아 백날 가도 아니다, 이러면 안 되겠지요?”(이용포, <무위당 장일순-생명사상의 큰 스승>)


그는 예수 탄생과 관련한 강연에서 예수가 구유에서 난 것은 짐승의 먹이로 온 것이며, 따라서 인간 세상만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공간과 무한한 시간에 걸쳐서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모두를 해결하러 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무위당이 하고 싶은 말은 구유에 온 예수를 통해서, 우주의 모든 티끌도 하느님이라는 절대와 하나라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는 것이다.


예수가 ‘내일 걱정은 내일하라’고 한 것도 상대적인 시간에 매여 살지 말고 절대적인 시간인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삶을 살라는 명령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생명은 유기물뿐 아니라 무기물을 포함하는 것으로 우주의 모든 것이다. 그는 “생명은 하나이고 절대이고 그 누구도 함부로 못하는 것이고,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권능이요 그분 자체이심을 알려주십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장일순의 하느님은 티끌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과 동일시되며 이는 그가 표현하는 ‘생명’과 동의어로 이해된다.(계속)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출처 : 인디언카페 꽃피는 나무 아래서
글쓴이 : 검은호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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