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나의 싸움 / 신현림
나의 싸움 / 신현림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 시집『세기말 블루스』(창작과비평,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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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끊임없는 싸움과 충돌의 연속이다. 세상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혼돈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집단에 적응하며 다른 사람들과 협조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와 협동의 가치가 여전히 중시됨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선 자신의 이득을 위해 다른 이의 뒤통수를 치고 자신이 우위를 점하기 위해 비상식적인 짓도 서슴지 않는다. 교활함과 비열함이 빤히 보이는데도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선량한 척 때로는 당당하기까지 하다.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자신에게 걸어오는 싸움이나 불가피한 충돌 상황에 얼마나 적절히 대응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충돌이라면 무조건 피하려 들거나 안이한 생각으로 덮고 눈을 감아버리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 해서 안전지대가 확보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싸움에 대한 두려움을 그릇된 온정으로 숨기고 있을 따름이고, 일견 선량하고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상황의 악화를 초래하고 자신과 둘레를 망칠 경우가 많다.
어떤 싸움은 피해야 하고 어떤 싸움은 불가피한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 ‘자신을 망치는 것과’는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떤 적들과는 타협이 불가능하며 중립지대도 없다.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과는 반드시 싸워야 하고 또 이겨내야 한다. 어떤 사회나 조직에서든 상식적인 수준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자신을 위장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방심해서는 안 되며 스스로를 그런 세력들로부터 지켜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굴복하고 만다면 민주적인 질서나 정의의 가치들은 더 이상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러한 늑대들의 면전에서 평화주의자가 되는 것은 끝없는 비극의 원천을 제공할 뿐이다. 때로 의리나 정리 따위의 사적 감정들은 진실에의 접근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사태변화가 가장 미묘할 때조차도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으로 갈팡질팡한다.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일반의 정서로는 쉽게 물러서고 말지만 인간이 지닌 ‘우울과 쓸쓸함’을 감출 수는 없다. 지금 이 나라에는 육영재단 이사장 정도 감당하면 딱 합당한 분이 최고 권좌에 앉아 상황을 틀어쥐고 있으니 매사가 뒤틀리고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에 맞서 서툰 야당의 여성대표가 가야할 길의 지향점을 찾지 못하고 한동안 표류해 왔다. 안이하고 그릇된 처신이 상황을 더욱 꼬이게 하여 스스로를 무너뜨리게 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최영미 시인은 '사는 이유'라는 시에서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이라며 싸움을 존재의 근거로 파악했다. 이 시에서는 시대의 부당함과 편견 따위와의 싸움을 의미하겠지만 가장 싸우기 힘든 것은 역시 자신과의 싸움이다. 언제나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이며 ‘지겨운 고통’이다. 이제 징글맞다. '어서 꺼지라구!' 그러고 싶지만 피해서는 안될 싸움이 있는 것이다. 돌팔매를 맞고 장렬히 전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권순진